감포에서 부터 경주로 길을 잡았다.
기림사,골굴암을 지나
감은사지로..
문무대왕릉 가는길에,
감은사지가 있었고,
절은 간곳없고,
높이 솟은 두개의 탑
그나마 하나는 보수 중이라
볼 수가 없었고, 베일 속에 가려진채 사진으로만 보았다.
새파란 하늘아래
탑신이 외로웠다.
절터엔 길손들만이 그림자를 보태고 섰다.
문무대왕이 승하하신 후
절 기단 아래에 출입구를 만들어서,
혼령이라도 들어 오셔서 왜인들의 침입을 막고자 만들어졌다는... 설명
토함산에 쌓인 잔설들을 보며,
도시 전체가 노천 박물관인 경주로 달렸다.
원효대사의 일화로 유명한 분황사에서,
동해남부선 기차타고 수학여행왔던 ,
그때가 떠오른다.
분황사 뜰에 줄서 앉아 노스님으로 부터 들었던, 원효의 철학은....해골속에 담겨진 물이라도 마음먹기에 따라 감로수가 된다던 그이야기..
벌써 40년도 더 지난 그때 일이 아직도 기억속에 있다.
분황사 앞 너른 들이,
말로만 듣던 황룡사지였다.
밭가운데
세월을 이고 당간지주가 솟아있고,
해학적으로 생긴 거북이가
두 기둥을 등에 얹고, 웃고 있다.
경주 박물관에 가서야 알았다.
가상으로 지어진 컴퓨터 그래픽에서,
몽고의 침략으로 불타기 전 절의 규모를...
경주를 도읍으로 정한 신라인들의 기상이 보였다.
목조건물인지라 오랜세월 버티지 못하고
역사속으로 사라진
한국 건축사의 슬픔과 아쉬움, 늘 침략받는 민족이라 더 그러하다.
봉정사 극락전 보수때 기둥아래에서 발견된 기록으로
그 건물이 공민왕 시대의 것임을 알 수 있었다지... 정원이와 그런 허무함에에 대해 얘기를 했다.
총 면적 이만오천평 ,
지금은 주춧돌만 남았지만,
가히 그 규모가 상상을 초월했다.
지독하게 사진 찍히기를 싫어하는 정원이 뒷모습,
그리고, 오른쪽 사람들이 모여 서 있는곳이 금당지 자리란다.
그 뒤로 멀리 산새가 너무 좋아 찍었다. 아마도 남산이 아니가 싶다.
경주 곳곳에서 김유신과 화랑관창, 기상 드높은 , 그리고 섬세한 신라인들을 만났다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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