monumantal.. 역사속으로

경주감은사지-황룡사지에서

candy57 2008. 2. 9. 15:28

 

 

감포에서 부터 경주로 길을 잡았다.

기림사,골굴암을 지나

감은사지로..

문무대왕릉 가는길에,

감은사지가 있었고,

절은 간곳없고,

높이 솟은 두개의 탑

그나마 하나는 보수 중이라

볼 수가 없었고, 베일 속에 가려진채 사진으로만 보았다.

 

 

새파란 하늘아래

탑신이 외로웠다.

 

 

 

 

절터엔 길손들만이 그림자를 보태고 섰다.

 

 

 

 문무대왕이 승하하신 후

절 기단 아래에 출입구를 만들어서,

혼령이라도 들어 오셔서 왜인들의 침입을 막고자 만들어졌다는... 설명

 

 

 

토함산에 쌓인 잔설들을 보며,

도시 전체가   노천 박물관인 경주로 달렸다.

원효대사의 일화로 유명한 분황사에서,

동해남부선 기차타고 수학여행왔던 ,

그때가 떠오른다.

분황사 뜰에 줄서 앉아 노스님으로 부터 들었던, 원효의 철학은....해골속에 담겨진 물이라도 마음먹기에 따라 감로수가 된다던 그이야기..

벌써 40년도 더 지난 그때 일이 아직도 기억속에 있다.

 

 

 

 

 

 

 

 

분황사 앞 너른 들이,

말로만 듣던 황룡사지였다.

밭가운데

세월을 이고 당간지주가 솟아있고,

해학적으로 생긴 거북이가

두 기둥을 등에 얹고, 웃고 있다.

 

 

 

 

 

 

  

 

 

 

 

경주 박물관에 가서야 알았다.

가상으로 지어진 컴퓨터 그래픽에서,

몽고의 침략으로 불타기 전 절의 규모를...

경주를 도읍으로 정한 신라인들의 기상이 보였다.

 

목조건물인지라 오랜세월  버티지 못하고

역사속으로 사라진

한국 건축사의 슬픔과 아쉬움, 늘 침략받는 민족이라  더 그러하다.

 

봉정사 극락전 보수때 기둥아래에서 발견된 기록으로

그 건물이 공민왕 시대의 것임을 알 수 있었다지... 정원이와 그런 허무함에에 대해 얘기를 했다.

 

 

 

 

 

 

총 면적 이만오천평 ,

지금은  주춧돌만 남았지만,

가히 그 규모가 상상을 초월했다.

지독하게 사진 찍히기를 싫어하는 정원이 뒷모습,

그리고, 오른쪽 사람들이 모여 서 있는곳이 금당지 자리란다.

그 뒤로 멀리 산새가 너무 좋아 찍었다.  아마도 남산이 아니가 싶다.

 경주 곳곳에서 김유신과 화랑관창, 기상 드높은 , 그리고 섬세한 신라인들을 만났다

 
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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